나는 직장 생활의 절반 가까이를 불투명한 그림자 속에서 보냈다.
이전 직장에서 배운 건 어쩌면 기술보다도 오래 남는 감정들이었다. 보고 라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어젯밤 합의가 아침 회의에서 다시 뒤집히던 일들. ‘윗선의 뜻’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변화는 왜 늘 그렇게 갑작스러웠을까. 사람들의 표정에서 나는 피로보다 먼저 불안과 체념을 보았다. 그곳에서는 결과가 과정보다 먼저 도착했고, 공정한 수고는 이미 뒤늦게 빛바랜 이름처럼 희미하게 아른거릴 뿐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공기 속에서 버티는 법을 익혔다. 하지만 오래 버틸수록, 내가 믿고 싶은 것들과 내 주변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것들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벌어졌다.
특히 업무 배분과 심사에서의 모호함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경험과 역량에 맞게 일을 나누는 대신, 어느 순간부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이 기준이 되곤 했다. 누구는 늘 전면에 섰고, 누구는 늘 뒤에서 허리를 굽혔다. 평가의 텍스트는 단정했지만, 그 텍스트를 낳은 맥락은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다. 공정하다는 말이 문서의 제목처럼 붙어 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과연 여기서 얘기하는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이란게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리했다. 그 의문은 기회의 비대칭이 지속될 때 더 짙어졌다. 학연과 연고가 보이지 않는 설득력을 갖고 흐를 때, 성과는 때로 결과가 아니라 관계의 증명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규모 인사 조정이 단행되었다. 정책 변경은 예고 없이 도착했다. 수년간 한 자리에서 전문성을 쌓아온 동료가 이전에 하던 업무들과 전문성 및 직렬과는 전혀 무관한 다른 부서로 전보되었고, 어떤 이에게는 소속 전환이라는 큰 변화가 통보되었다. 나와 가까웠던 한 동료는 오랫동안 맡아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한순간에 다른 손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가 나지막이 내뱉은 말이 내 귓가에서 오래 울렸다. “열심히 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지켜지지 않는 게 있구나.” 그날 나는 신의·성실의 원칙이 왜 공동체의 가장 낮고 넓은 바닥인지 새삼 알게 됐다. 그 바닥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더 이상 어제와 내일을 연결하지 못한다. 계획은 가벼워지고, 다짐은 산란해진다. 그리하여 나는 떠나왔다. 잘못을 탓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다시 배우기 위해서였다.
새 직장에 들어와서는 다분히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아직 팀장이 보직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일을 각자의 기준에서 업무를 진행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팀장님이 보직하게 되었고, 그가 들어선 첫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공기의 질감이었다. 바쁘되 급하지 않고, 차분하되 굳어 있지 않은 공기. 회의실에 들어서자 팀장님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오래 이곳에 몸담아 온 베테랑이라 들었다. 그는 높고 낮은 억양 없이, 마치 물결처럼 잔잔하게 말했다. “업무는 사람을 힘들게 하려고 나누는 게 아닙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배분하는 것이 우리 팀의 원칙입니다.” 많은 원칙이 구호처럼 흘러가는 시대에, 그 말은 이상하게 몸에 닿는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작은 사건이 있었다. 촉박한 일정 때문에 몇몇이 남아 일을 정리해야 했다. 나는 동기에게서 문서를 건네받으며 속으로 계산을 했다. ‘이건 시간이 더 필요하겠다.’ 그때 팀장님이 조용히 내 옆에 와 섰다. “이건 네 몫만의 일이 아니야. 우리가 함께 맡은 일이야.” 그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문서의 앞장을 넘겼고, 옆자리 동료에게는 “이 부분은 네가 더 잘 보잖아. 네 관점으로 한 번만 봐줘.”라고 부탁했다. 두 문장이 공간의 온도를 바꾸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청렴은 결국 태도라는 것을. 규정의 목록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눈높이와 손끝의 방향이라는 것을.
업무 배분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기준으로 흘렀다. 경력이 적은 사람에게는 배우면서도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과제를,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책임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과제를 맡겼다. 동시에 한쪽으로 업무가 쏠리지 않게 살폈다. 팀장님은 구성원 각자의 여건을 기억했다. 돌봄이 필요한 동료에게는 일정 조정을 먼저 제안했고, 장기간 프로젝트를 맡은 동료에게는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권했다. “일 잘하는 사람이 오래 일하게 하려면, 일 그 자체가 그 사람을 지켜줘야 합니다.” 그가 회의에서 남긴 이 한마디는, 우리가 일을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를 확실히 바꾸어 놓았다.
회의 문화도 달라졌다. 발표를 앞두고 목이 마르는 경험, 말끝이 돌아 돌아 나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런 감정은 여기서 낯설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자 팀장님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 “틀림은 있어도 무의미한 의견은 없어요. 다만, 우리가 서로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구체적이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은 내 의견을 들어준다는 약속일 뿐만 아니라, 그 의견을 더 나은 방향으로 함께 다듬어 주겠다는 신뢰의 표식이었다. 나는 점점 더 자주 손을 들었다. 동료들도 그랬다. 토론은 때로 파도가 높을 때도 있었지만, 그 파도는 서로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멀리 가기 위한 동력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오후, 막내 동료가 잠시 복도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띄게 힘이 빠져 있었다. 팀장님이 다가가 짧게 물었다. “오늘은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어요?” 막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제가 팀에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다. 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결과로만 서로를 보지 않아요. 네가 묻는 태도가 우리를 앞으로 끌고 가. 묻는 사람 덕분에 네 옆사람이 자신의 일을 다시 보게 되니까.” 그 대화 이후로 막내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작은 격려는 숫자로 측정할 수 없지만, 조직의 흐름을 바꾸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런 경험들이 쌓아 올려질 때마다, 비교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낯선 부서로의 전보, 설명 없는 정책 변경. 그런 가능성들은 목소리를 가라앉히기에 충분한 무게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의견을 말하는 일이 위험의 징후가 아니라, 신뢰의 시작이었다. 청렴한 문화는 사람들에게 용기의 다른 이름을 선물했다. 우리는 서로 같은 눈높이에서, 동료의 자리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책임과 배려의 폭을 넓히려 한다. 청렴은 누군가를 꺾어 세우는 기치가 아니라, 서로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 주는 방패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시간이 흐르며, 일과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언어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이 일이 내 몫인가, 네 몫인가”를 먼저 따졌다면, 지금은 “이 일을 우리가 어떻게 나눌 때 가장 멀리 갈 수 있을까”를 묻는다. 예전에는 실수의 원인을 먼저 찾았다면, 지금은 그 실수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함께 돌아본다. 나의 변화는 거창하지 않다. 점심시간을 10분 덜 쓰고 업무를 하는 종류의 성실함이 아니라, 동료의 문장에 한 줄의 구체를 더해 주는 성실함에 가깝다. 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을 모두가 같은 장면으로 떠올릴 수 있게 표현을 다듬고, 업무를 나눌 때 “지금 그 사람의 삶”을 함께 고려하는 일. 이 소소한 선택들이 쌓일수록, 나는 내가 믿는 청렴이 추상에서 생활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낀다.
어느 금요일, 팀은 작은 성취를 함께 축하하기로 했다. 회식 자리에 모였지만, 부담이 되지 않게 시간과 비용을 가볍게 정했다. 팀장님은 먼저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의 축하가 누군가의 내일을 무겁게 하면 안 됩니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선이 분명하게 들어 있었다. 자리를 떠나며 동기가 내게 속삭였다. “저는 이런 문화라면 오래 다니고 싶어요.”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청렴이 규정의 목록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기쁨과 휴식의 방식까지 바꾸어 놓을 때, 조직은 오래가는 힘을 갖게 된다.
개인의 경험은 결국 사회를 향한 시선을 넓힌다. 이전에 느껴왔던 불투명함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불투명함은 개인의 상처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공공을 향한 신뢰를 서서히 갉아먹는다. 반대로 지금의 투명함과 존중은 개인을 살리고 팀을 키우며, 더 넓은 공동체에 파장을 만든다. 공직자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권한을 사적으로 쓰지 않는 절제, 신뢰를 매일의 태도로 지켜 내는 인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서로를 지키는 겸손. 이 세 가지가 모여 사회는 조용히 단단해진다.
나는 이제 다짐한다. 언젠가 내가 후배를 이끌 자리에 서게 된다면, 오늘의 팀장님처럼 원칙을 말하는 입술과 사람을 살피는 눈을 잃지 않겠다고. 업무를 배분할 때는 힘의 균형보다 삶의 균형을 먼저 떠올리고, 피드백을 건넬 때는 정답보다 가능성을 먼저 보겠다고. 바쁨을 이유로 존중을 생략하지 않고, 성과를 이유로 배려를 유예하지 않겠다고. 청렴은 내게 선택지를 좁히는 규제가 아니라, 모두가 숨 쉬는 공기를 맑게 하는 규범이다. 그 공기를 매일 새로 환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퇴근길, 창에 비친 내 얼굴이 전보다 차분해 보였다. 유리문을 나서며 나는 마음속에 한 문장을 적었다. “그림자는 걷히고, 남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다.” 이전에 느꼈던 해묵은 경험과 감정은 반면교사가 되어 내 걸음을 바로 세워 주었고, 현 직장에서 만난 팀장님은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보여 주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청렴은 무엇이냐고.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청렴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 쌓여 만든 길입니다. 그 길을 함께 걷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밤, 내 책상 한쪽에 작은 메모를 붙였다.
“일은 사람을 지키는 방식으로 나누고, 평가는 사람을 키우는 언어로 남긴다.”

그 문장이 내일의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기를.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그 문장을 보고 미소 지을 수 있기를.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림자를 걷어 낼 것이다. 빛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는 걸, 오늘 나는 알았다.
기술보호조사팀 허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