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7월 1일, 조달본부 품질보증부서와 국방과학연구소 부설 품질검사단을 단일기구로 통폐합하여 ‘국방품질검사소’가 탄생한다. 국방품질검사소, 국방품질관리소, 국방품질관리연구소를 거쳐 오늘날의 국방기술품질원으로 변모하기까지 그 안에는 많은 환희와 굴곡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올해 창설 40주년을 맞은 국방기술품질원의 지난 이야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본다.
1981년 4월 1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에 위치한 국방과학연구소 건물 내 창고동 204호. 사무실에 모인 11명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하루 전, 국방부가 창설 위원회를 구성해 국방품질검사소의 창설계획을 수립해 보고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위원장은 국방과학연구소 품질검사단장(이병간 육군준장)이, 위원은 국방부 조달본부 직원과 국방과학연구소 품질검사단 직원으로 구성됐다.
창설까지 남은 시간은 단 3개월! 3개월 만에 새로운 기관을 창설해야한다! 창설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위원회는 밤샘 작업을 이어갔다. 기관의 임무·기능·조직을 새롭게 마련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인력 확보였다.
조달본부의 품질보증부서 인력들은 군의 특성상 명령에 따르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었고, 품질검사소 직원이 되면 처우가 좋아져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그러나 국방과학연구소 품질검사단 인력들은 연구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새로운 기관으로 옮기는 것을 매우 꺼렸다.
창설계획을 수립하는 한편으로 핵심 인재 영입 작전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창설위원 중 국방과학연구소 출신들이 인맥과 안면을 동원해 국방과학연구소의 간부와 접촉하고 영입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영입을 승낙한 사람들은 그들이 데리고 있던 연구인력을 함께 영입함으로써 200여명에 이르는 인원을 충원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영입 대상자와 기존 직원들 간에 다툼도 일어나고, 동료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다.
마침내 국방부 장관이 6월 12일 창설위원회가 제시한 창설계획을 승인하면서, 7월 1일부로 서울 용산구 용산동 2번가 7번지에 ‘국방품질검사소’가 창설된다. 초대 소장으로는 육사 제12기, 미 스탠포드대학 전자공학 박사인 이병간 준장이 임명됐다. 이병간 소장은 창설이념에서 특히 ‘인화’를 강조했는데, 조달본부 직원(130여 명)과 국방과학연구소 직원(220여 명) 간 융합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원화된 조직을 짧은 시간에 물리적으로 통합했기 때문에 많은 부작용과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고, 무엇보다 품질보증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차이가 있었다. 조달본부 직원들은 ‘계약’에 중점을 두고 품질보증을 수행하는 반면, 국방과학연구소 직원들은 ‘연구개발’에 중점을 두고 품질보증을 수행했던 것이다. 또, 조직 내 국방과학연구소 출신 직원의 수가 더 많았기 때문에 조달본부 출신 직원들이 소외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정부품질보증 물량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부서는 물론 직원들 간의 협업 없이는 업무가 불가능해졌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조직문화가 자리 잡아 갔다.
품질보증 연구원들에게 품질보증 매뉴얼과 품질검사 도장은 떼놓을 수 없는 단짝 같은 존재였다. 작은 부품에서부터 거대한 항공기까지 품목을 가리지 않고 품질보증을 수행하다 보니 품목별 특성에 따른 품질보증 절차를 담은 매뉴얼은 필수적이었다. 또, 연구원들은 품질보증을 완료한 모든 부품 및 무기에 품질검사 도장을 찍어야 했는데, 이 도장에는 연구원 개개인의 고유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누가 해당 품목의 품질을 보증했는지를 알려주는 실명제 역할을 한 것이다.
부품과 무기에 찍힌 도장은 연구원들에게 자부심과 책임감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한편, 일부에서는 품질보증을 도장 찍는 일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품질보증을 하다보면 설계상의 결함을 발견하고 ‘기술변경’을 실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1980년대 후반부터 전사적 품질관리 개념이 도입되면서 품질검사가 아닌 한차원 높은 ’품질관리‘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억울한 감정이 컸다.
결국 1989년 실질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업무를 모두포괄하는 ‘국방품질관리소’로 명칭을 변경하고, 전반적인 품질관리 기관으로서 새로운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
1990년대 홍릉에 위치한 국방품질관리소의 사무실은 오래도록 불이 꺼질 줄 몰랐다.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새벽까지 일에 몰두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가 다르게 업무 범위와 분량이 늘어나고 있었다. 정부품질보증 외에도 시험분석(1994), 대군지원(1995), 형상관리(1996), 저장신뢰성평가(1998) 업무가 새롭게 추가됐다. 모두가 힘에 부쳤다. 일의 분량도 과도했고, 일의 전문성 또한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밤을 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피나는 모두의 노력으로 1997년 ‘국방품질관리연구소’로 기관 명칭을 변경하고, 63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국방연구기관으로 거듭나게 된다.
1998년 4월의 어느 날, ‘국방품질관리연구소’에는 먹구름이 짙게 깔렸다. 연구소를 폐지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연구소와 조달본부를 통합해 조직을 30% 이상 축소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IMF로 인해 국가적으로 정부기관의 축소를 강도 높게 추진하던 때였다. 국방품질관리연구소도 예산 절감, 조직 개편 등을 통해 업무를 효율화하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근데 30% 이상 축소라니… 우리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말, 국방부의 구조조정 계획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 차원에서 ‘국방품질관리연구소 개혁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낮에는 국방부로, 밤에는 사무실로 돌아와 자료를 준비했다. 매일 같이 장관실에 들렀지만 국방부 장관의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었고, 아무런 소득 없이 2개월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획득분야 구조조정의 열쇠를 쥔 사람이 당시 획득정책국장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작정 국장실로 찾아가 면담을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틀 만에 국장 보고를 할 수 있었고, 그날부터 매일 자료를 보완하여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장관 보고를 할 수 있었다. 위원회를 구성한지 4개월만의 일이었다.
8월 중순, 개혁 방안과 구조조정 방안이 최종 결정됐다. 정원을 633명에서 488명으로 줄이고, 다시 ‘국방품질관리소’로 명칭을 변경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날부터 대규모 명예퇴직과 조기퇴직이 실시됐다. 많은 선배와 동료들이 조직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퇴직에 응했다. 당시 항공분소장은 정년이 10여 년 남았음에도 후배들을 위해 명예퇴직하겠다는 의사를 제일 먼저 표명하기도 했다. 그분들의 용기와 희생은 훗날 ‘국방기술품질원’이라는 새로운 기관으로 도약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